최근 발표되는 미국 경제 지표들을 보면 지표상으로는 매우 견고한 모습입니다. S&P 500 지수는 역사적 고점 부근에 머물고 있으며, 미국 직장인들의 401(k) 퇴직연금 평균 잔액은 약 168,000달러(한화 약 2억 5,000만 원)를 돌파하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수치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 통계 수치 뒤에는 다른 현실이 숨어 있습니다. 은퇴 후의 삶을 지탱할 최후의 보루인 401(k)를 깨서 당장의 생활비로 쓰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긴급 인출 건수는 2021년 대비 무려 365%나 폭증했습니다. 약 150만 명의 미국인이 10%라는 막대한 벌금을 감수하면서까지 미래 자산을 끌어다 쓰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현상의 원인과 이것이 미국 부동산 시장에 가져올 실질적인 변화를 짚어보겠습니다.

◆ 401(k)란 무엇인가: 미국 중산층의 핵심 자산 구조

401(k)는 미국 직장인이 급여 일부를 세전으로 적립해 은퇴 자금을 만드는 대표적인 퇴직연금 제도입니다. 기업이 일정 금액을 매칭해주고, 과세가 은퇴 시점까지 유예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매우 강력한 자산 축적 수단입니다.

이 계좌는 “은퇴 전에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라는 암묵적인 룰이 있습니다. 만 59.5세 이전에 인출할 경우 10%의 벌금과 소득세를 한꺼번에 부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도 인출이 급증했다는 것은, 현재 미국 가계가 벌금을 감수해야 할 만큼 극심한 현금난에 처해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미국 401k 퇴직 연금

팬데믹 이후 사라진 현금: 자산은 늘었지만 쓸 돈은 없다

왜 미국인들은 미래를 팔아 오늘을 버티는 선택을 하고 있을까요? 가장 큰 원인은 팬데믹 이후 가계 저축의 실종에 있습니다. 코로나 시기 정부 지원금으로 쌓였던 약 2조 1,000억 달러의 초과 저축액은 이미 2023년에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현재 미국 근로 연령층의 비상 저축액 중간값은 단돈 1,000달러(약 150만 원) 수준에 불과합니다. 집값과 주식 등 자산 가치는 올랐지만, 정작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동차 수리비나 갑작스러운 의료비 지출이 발생하면, 신용카드 한도까지 꽉 찬 중산층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는 결국 401(k) 중도 인출뿐인 상황입니다.

◆ 왜 노후 자금까지 쓰는가?

2025년 기준 401(k) 가입자의 약 6%가 ‘하드십 인출(Hardship Withdrawal)’, 즉 긴급 인출을 선택했습니다. 팬데믹 이전 2% 수준이었던 것에 비하면 3배나 급증한 수치입니다. 인출 사유를 들여다보면 현재 미국 중산층이 어디에서 무너지고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주거 비용(36%)입니다. 집이 압류되는 것을 막거나, 밀린 월세를 내지 못해 퇴거 위기에 몰린 가구들이 집을 지키기 위해 노후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의료비(31%)입니다. 미국은 민간 보험 중심 구조이기 때문에 보험이 있어도 본인 부담 비용이 큽니다. 응급실 방문 한 번에 수백에서 수천 달러, 입원이나 수술 시에는 $5,000~10,000 이상의 비용이 발생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러한 비용은 대부분 예측이 어렵고 갑작스럽게 발생하기 때문에, 저축이 부족한 가구일수록 은퇴 자금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여기에 교육비까지 더해지면서, 중산층 가계는 동시에 여러 비용 압박을 받는 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401k 인출 사유

정책 변화의 영향: 접근성 확대가 만든 역효과

이러한 인출 폭증 현상의 배경에는 정책적인 변화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바로 SECURE 2.0 법안의 도입입니다. 과거에는 401(k) 중도 인출을 위해 매우 까다로운 증빙 서류가 필요했지만, 이 법안을 통해 자기 인증 제도가 도입되면서 절차가 대폭 간소화되었습니다.

특히 연간 1회 최대 1,000달러까지는 10%의 조기 인출 벌금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길까지 열리면서, 퇴직연금을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비상금 계좌로 인식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정부는 긴급 자금 문제를 해결해 주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중산층이 장기적인 노후 자산을 단기적인 생존 비용으로 소진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된 셈입니다.

SECURE 2.0 법안

◆ 부동산 시장으로 이어지는 영향

가계의 현금 흐름 악화는 부동산 시장에도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주택 구매 수요의 위축입니다. 주택 매수를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다운페이먼트(계약금)가 필요하지만, 저축을 유지하지 못하고 연금까지 인출하는 상황에서는 장기 자산인 주택 구매를 미루는 가구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임대 시장의 압박은 지속될 가능성이 큽니다. 매수를 포기한 수요가 임대 시장에 머물면서 수요를 견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요 도시의 임대료는 이미 팬데믹 이전보다 20~30% 이상 상승한 상태이며, 이러한 수급 불균형 상황에서는 가격 안정화가 더디게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결과적으로 주택 구매 문턱은 높아지고 임대료 부담은 유지되는 구조적 이중고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현재 미국에서 관찰되는 현상은 단순한 경기 변동을 넘어 중산층의 재정 구조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생존을 위해 미래의 부를 희생하는 구조는 장기적인 소비력 약화와 자산 시장의 변동성을 키울 가능성이 큽니다. 시장의 외형적인 가격뿐만 아니라 실제 가계의 재정 건전성을 함께 살펴야 하는 이유입니다.